걷기운동, 분노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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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 🚶‍♀️ 걷기운동, 분노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 “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때, 무작정 걸었습니다.” 그날도 일상 속에서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터질 듯이 차올랐어요.  말로 풀자니 상처만 깊어질 것 같았고, 가만히 있자니 속이 터질 것 같았죠. 그래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습니다. 그저 걷기 위해서요. 처음엔 빠르게, 그리고 점점 호흡을 가다듬으며 걸었어요. 신기하게도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자, 내 안의 분노가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졌어요 . 🔥 걷기운동이 분노를 잠재우는 이유 우리의 뇌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**편도체**가 활성화되며, 이곳이 바로 '공포'와 '분노'를 조절하는 센터입니다. 걷기운동은 이 편도체의 반응을 완화시키고, 세로토닌과 도파민 같은 안정 호르몬을 분비 하게 해요. 즉, **걸으면 뇌가 차분해지고 마음도 진정**되는 거죠. 🌿 감정이 요동칠 땐, 이처럼 걸어보세요 조용한 거리나 공원을 선택 해보세요. 처음엔 분노의 에너지로 빠르게 걷고 , 점점 호흡에 집중하며 속도를 낮춰보세요 . "나는 지금 왜 화가 났을까?" 혼잣말로 마음을 탐색해보세요. 하늘을 올려다보고 햇살을 느껴보는 것 도 감정 전환에 큰 도움이 돼요. 💬 걷기 중 들려온 마음의 소리 "왜 그렇게 화가 났지?" "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일까?" "혹시 내 안에 쌓인 다른 감정이 더 컸던 건 아닐까?" 이렇게 걸으며 나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, 어느새 감정이 흘러가고 , 내 안의 불꽃이 잦아드는 경험 을 하게 됩니다. 🚶 걷기운동은 단순한 운동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'운동'을 몸만 움직이는 일이라 생각하지만, 걷기는 몸과 마음을 함께 치유하는 유일한 도구 예요. 특히 감정의 폭풍이 몰아치는 날엔, 억지로 ...

예배와 헌신의 주어는 누구일까요?

 

■ 예배와 헌신의 주어는 누구일까요?

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‘누가 중심인가?’라는 질문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. 기도하고, 섬기고, 예배드리는 그 모든 행위들 속에서 **주어는 과연 누구일까요?** 혹시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요?



빌립보서 3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. “주 안에서 기뻐하라.” 그런데요, 상황은 기뻐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. 바울은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고, 앞날은 불투명했지요. 그런데도 그는 담대하게 외칩니다. “기뻐하십시오! 단, 그 기쁨은 '주 안에서'입니다.”

이는 곧, **기쁨의 주어가 환경이 아니라 ‘주님’이라는 고백**인데요.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, 주체가 내가 아닌 **하나님이시라면 가능해지는 것이 참 많아집니다.**

■ 진정한 예배자의 조건은 무엇일까요?

당시 교회에선 할례를 강조하며, 육체적 행위를 통해 구원이 이뤄진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어요. 바울은 이런 유대주의자들, 즉 할례파를 강하게 경고하면서 말씀합니다.

“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,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,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참된 할례파입니다.” (빌 3:3)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신자는 외적인 율법의 행위가 아닌,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에 중심을 두는 자들이에요. 예배와 섬김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신 삶, 그게 바로 복음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.

■ 바울, 자랑할 것이 참 많았던 사람인데요…

바울 자신도 사실, 유대인으로서 자랑할 조건이 정말 많았죠. 그가 말하길,

  • 여드레 만에 받은 할례
  • 이스라엘 백성, 베냐민 지파 출신
  •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
  • 율법에 철저한 바리새인
  •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했던 자
  •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삶
  •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최고의 교육
  •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자
지금식으로 말하자면, 신분, 지식, 열심, 영향력까지 모두 갖춘 사람이었지요.

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**“해로 여겼다”고 말하며**, 한 걸음 더 나아가 “배설물처럼 여긴다”고 고백합니다. 이유는 분명합니다. “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”이에요.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, 그분 안에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확신했던 겁니다.

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기쁨

환경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신다면,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요. 눈물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, 시련 중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거예요. 왜냐하면, 우리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죠.

**내가 드리는 예배의 주어는 누구인가요? 내가 하는 헌신과 봉사의 주체는 정말 주님이신가요?** 이 질문은 우리를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게 만듭니다.

오늘 하루도 나의 자랑이 ‘나’가 아니라 ‘예수님’이 되길 소망합니다. 주님을 아는 것, 주님을 기뻐하는 것, 그리고 그분 안에 사는 것이 **가장 고상한 삶**임을 기억하며 걸어가 봅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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